전쟁이 나도 달러가 오르지 않는다: 이란 재교전과 ‘달러 스마일’의 균열

거시경제 교과서에는 오래된 공식이 하나 있습니다. 세계 어딘가에서 포성이 울리면 글로벌 자금은 달러로 도망친다는 것. 특히 중동에서 미사일이 날면 유가가 뛰고, 유가가 뛰면 달러가 오르고, 신흥국 통화는 얻어맞는다는 3단 논법은 지난 반세기 동안 거의 예외 없이 작동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 이 공식이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사건을 먼저 정리하겠습니다. 지난달 종전 양해각서(MOU)에 서명하며 60일 휴전에 들어갔던 미국과 이란이 다시 충돌했습니다. 7월 6~7일 호르무즈해협을 지나던 상선 3척이 사전 항로 협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이란에 피격됐고, 미군 중부사령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이란 남부의 표적 약 80곳을 공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란의 보복 공격이 이어졌고, 트럼프 대통령은 8일 앙카라 나토 정상회의에서 “이란과의 종전 MOU는 끝난 것 같다”, “그들과 거래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말하며 휴전 파기를 시사했습니다.

시장의 첫 반응은 교과서 그대로였습니다. WTI 8월물은 장중 배럴당 72.46달러까지 2.87% 급등했고, 브렌트유도 2.75% 오르며 약 2주 만의 최고가를 기록했습니다. 호르무즈는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지나는 길목이니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달러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달러 인덱스(DXY)는 100선 부근에서 사실상 횡보했습니다. 2월 말 개전 당시 위험회피 자금이 달러로 쏠리며 인덱스가 단숨에 뛰어올랐던 것과 비교하면, 이번에는 마치 시장이 전쟁 뉴스를 달러 매수 재료로 인식하지 않는 듯한 모습입니다. 유가는 교과서대로 반응했는데 달러만 교과서를 덮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이 침묵이 이번 주 가장 중요한 시장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왜 달러가 오르지 않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일회성 소음인지 아니면 달러 체제의 구조적 변화를 알리는 균열인지를 짚어보겠습니다.

복습: ‘달러 스마일’과 3월의 정상 작동

먼저 이론적 틀부터 정리하겠습니다. 외환시장에는 ‘달러 스마일(Dollar Smile)’이라는 유명한 프레임이 있습니다. 달러는 두 가지 상황에서 강해집니다. 첫째, 미국 경제가 독보적으로 좋을 때(성장 프리미엄). 둘째, 세계가 공포에 질렸을 때(안전자산 프리미엄). 그 사이, 즉 미국이 어중간하게 둔화되고 세계가 평온할 때 달러는 약해집니다. 웃는 입 모양의 양쪽 끝이 강세, 가운데가 약세라 스마일이라 부릅니다.

이 프레임에서 전쟁, 특히 유가를 위협하는 중동 전쟁은 스마일의 오른쪽 끝, 즉 공포 프리미엄을 자극하는 대표적 이벤트입니다. 실제로 올해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에픽 퓨리 작전’으로 이란을 대규모 공습하고 최고지도자 하메네이가 사망했을 때, 시장은 정확히 이 각본대로 움직였습니다. 글로벌 증시가 급락하고, 금 선물이 하루 6% 이상 폭등해 온스당 4,900달러까지 치솟았으며, 달러 인덱스는 투자자들이 위험자산을 처분하고 달러 현금 확보에 나서면서 99선까지 한 주 사이 1.3% 넘게 상승했습니다. 당시 JP모간은 이 달러 수요 급증을 시장 자금이 다른 자산으로 이동하지 않고 있다는 신호로 평가했습니다.

즉, 불과 4개월 전만 해도 ‘전쟁 → 달러 강세’ 회로는 멀쩡히 작동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전쟁의 재점화에 달러가 반응하지 않는다면, 변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달러를 둘러싼 조건입니다. 무엇이 변했을까요? 저는 네 가지 층위로 나눠 보겠습니다.

전쟁이 나도 달러가 오르지 않는다: 이란 재교전과 '달러 스마일'의 균열
전쟁이 나도 달러가 오르지 않는다: 이란 재교전과 '달러 스마일'의 균열 2

숫자로 보는 비대칭: 3월과 7월, 같은 전쟁 다른 반응

두 국면의 시장 반응을 나란히 놓으면 비대칭이 선명해집니다. 2월 말~3월 초 개전 국면에서는 유가가 한 달 새 40% 이상 폭등했고, 금이 하루 6% 급등(2009년 이후 최대 일간 상승률)했으며, 달러 인덱스가 주간 1.3% 이상 올랐고, 미 10년물 금리는 4%에서 4.40%까지 치솟았습니다. 나스닥 선물은 1%대 후반 급락했고 비트코인도 7만 3천 달러대까지 밀렸습니다. 모든 자산이 교과서의 자기 자리로 이동한, 전형적인 리스크오프였습니다.

반면 이번 7월 재교전 국면에서는 유가가 2%대 상승에 그쳤고, 달러 인덱스는 100선에서 횡보했으며, 금은 급등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이던 반등 추세를 이어가는 정도입니다. 국채금리는 오르기는커녕 신용 우려와 고용 둔화로 하락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충격의 크기가 줄었다고만 보기에는 자산 간 반응의 ‘방향’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특히 달러와 금리의 반응이 3월과 정반대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전쟁이라는 입력값은 같은데 출력값이 다르다면, 함수가 바뀐 것입니다. 이하에서 그 함수를 바꾼 네 개의 변수를 하나씩 열어보겠습니다.

이유 1: 리스크 프리미엄의 감가상각 — 시장은 학습한다

가장 단순한 설명은 반복 학습입니다. 시장은 같은 충격에 두 번 놀라지 않습니다. 2월 개전, 3월 호르무즈 봉쇄 위협, 4월 확전 공포, 5~6월 휴전 협상과 MOU 체결, 그리고 이번 재교전까지. 시장 참여자들은 이미 이 전쟁의 패턴을 학습했습니다. 격화와 소강이 반복되고, 어느 쪽도 전면전으로 갈 능력과 의지가 제한적이며, 결국 협상 테이블로 돌아온다는 패턴 말입니다.

행동재무학적으로 표현하면 지정학 리스크 프리미엄에도 감가상각이 적용됩니다. 첫 번째 충격에는 최대치의 프리미엄이 붙지만, 같은 유형의 충격이 반복될수록 프리미엄은 줄어듭니다. 이번에 유가가 2%대 ‘만’ 오른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3월에는 한 달 새 40% 이상 급등했던 유가가, 이번에는 2주 최고가 수준에서 멈췄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파기를 시사하면서도 “미국 대표단이 이란과 대화하는 것은 허락할 수 있다”고 여지를 남긴 것까지, 시장은 이미 다음 장면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설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학습 효과는 반응의 크기를 줄일 수는 있어도 방향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달러가 ‘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오르지 않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유 2: 미국이 당사자이자 청구서 수취인이다

여기서부터가 본질입니다. 달러가 전쟁의 안전자산이 되려면 한 가지 암묵적 전제가 필요합니다. 전쟁이 미국 바깥의 문제여야 한다는 것.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랬고, 과거 대부분의 중동 분쟁이 그랬습니다. 미국은 관전자 혹은 조정자였고, 세계의 불안은 미국 국채와 달러의 수요로 전환됐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쟁은 다릅니다. 미국이 교전 당사자이며, 무엇보다 비용 지불자입니다. 숫자를 보겠습니다. 백악관은 이미 전쟁 비용 충당을 위해 670억 달러 규모의 연방 예산을 의회에 요청한 데 이어, 지난달에는 876억 달러(약 135조 원) 규모의 추가 예산을 다시 요청했습니다. 이 중 약 700억 달러가 국방부의 작전 비용 보전입니다. 미국 정부 부채가 이미 38조 달러를 넘어선 상황에서, 전쟁이 재개될 때마다 시장이 보는 것은 지정학 공포가 아니라 추가 국채 발행분입니다.

다시 말해, 이 전쟁은 달러의 관점에서 안전자산 수요 이벤트가 아니라 재정 악화 이벤트로 재분류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시리즈에서 다뤄온 재정 지배(fiscal dominance)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재정적자가 통화정책과 통화가치를 압박하는 국면에서는, 정부 지출을 늘리는 모든 이벤트가 통화에 마이너스로 계상됩니다. 전쟁은 그중 가장 비싸고 가장 예측 불가능한 지출입니다.

이유 3: 정치적 취약성 — 약한 대통령의 전쟁

세 번째 층위는 정치입니다. 파이낸셜타임스가 여론조사업체 포칼데이터에 의뢰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 등록 유권자의 58%가 이란 전쟁이 비용만큼의 값어치를 하지 못했다고 답했고, 44%는 전쟁으로 미국이 이란에 대해 오히려 더 약한 위치에 놓였다고 평가했습니다. 무당층에서 트럼프 대통령 지지율은 한 달 새 8%포인트 급락해 21%에 그쳤습니다. 공화당이 다수당인 상·하원이 대통령의 대이란 전쟁 권한을 제한하는 결의안을 잇따라 처리했다는 사실은, 전쟁 수행의 정치적 기반이 여당 내부에서조차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11월 중간선거를 4개월 앞둔 시점입니다. 의회 선거 지지 의향에서 민주당이 6%포인트 앞서고 있고, 유권자의 66%는 이란과의 양해각서가 중동 안정에 도움이 안 되거나 오히려 불안정을 키울 것이라고 봅니다. 외환시장 참여자의 눈으로 이 그림을 보면, 전쟁의 재점화는 미국의 힘의 과시가 아니라 정책 불확실성의 확대입니다. 전쟁 수행 능력에 대한 의회의 제약, 예산안 통과의 불투명성, 중간선거 이후 의회 지형 변화 가능성까지. 통화의 가치는 결국 그 통화를 발행하는 정치 시스템의 신뢰도 함수인데, 지금 그 신뢰도에 프리미엄을 지불할 이유가 마땅치 않은 것입니다.

이유 4: 연준 기대 경로 — 금리가 달러의 발목을 잡다

네 번째 층위는 통화정책입니다. 3월과 지금의 가장 큰 거시 환경 차이는 연준을 둘러싼 기대입니다.

3월 개전 직후를 복기해 보면, 유가가 급등하자 시장은 곧바로 인플레이션 재점화와 연준의 금리 인상 가능성을 가격에 반영했습니다. 미 10년물 국채금리는 전쟁 전 4% 수준에서 한 달여 만에 4.40%까지 치솟았고, 이 금리 상승이 달러 강세를 뒷받침하는 동시에 금값을 3월 고점 대비 10% 가까이 끌어내렸습니다. 전쟁 자체보다 전쟁이 유발한 금리 기대 변화가 자산 가격을 지배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 방향의 힘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7월 첫째 주 발표된 미국 고용 지표가 둔화 신호를 보내면서 금리 인상 우려가 완화됐고, 이것이 금값 반등의 계기가 됐습니다. 여기에 1.7조 달러 규모의 사모대출 부실과 상업용 부동산 문제가 임계점에 다가서고 있다는 신용시장 우려가 겹치며, 국채금리는 오히려 하락 압력을 받는 국면입니다. 지정학 충격이 연준의 완화 명분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해석까지 나옵니다. 케빈 워시 의장 체제의 연준이 완화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는 시장 전망도 이 기대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금리 기대가 아래를 향하는 국면에서는 전쟁 뉴스조차 달러를 밀어 올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전쟁발 유가 상승이 실질 구매력을 잠식하고 성장을 갉아먹는 스태그플레이션 시나리오로 읽히면, 달러 스마일의 왼쪽(미국 경기 둔화) 방향으로 해석되어 달러에 부정적일 수 있습니다. 같은 포탄이 4개월 전에는 달러 매수 신호였는데 지금은 달러 중립 내지 매도 신호로 읽히는 이유, 그 절반은 연준 기대 경로의 반전에 있습니다.

역사의 각주: 전쟁 비용이 기축통화를 꺾은 두 장면

‘전쟁이 나도 오르지 않는 기축통화’라는 현상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역사에서 두 장면을 소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1956년 수에즈 위기입니다. 당시 파운드는 쇠퇴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세계 준비자산의 큰 축이었습니다. 영국이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에 맞서 군사 개입을 감행하자, 시장은 영국의 군사력이 아니라 재정을 봤습니다. 파운드 투매가 시작됐고,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자 영국은 IMF 지원이 절실해졌습니다. 미국은 군사 철수를 지원 조건으로 걸었고, 영국은 굴복했습니다. 전쟁을 시작할 힘은 있었지만 그 비용을 감당할 통화 신뢰가 없었던 것입니다. 수에즈는 군사적 사건이기 이전에, 파운드가 ‘위기 때 도망칠 통화’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상실한 통화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두 번째 장면은 베트남 전쟁과 1971년 닉슨 쇼크입니다. 존슨 행정부는 ‘총과 버터’, 즉 전쟁과 복지 확대를 동시에 밀어붙였고, 그 청구서는 재정적자와 인플레이션으로 돌아왔습니다. 금 1온스당 35달러라는 브레턴우즈 약속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자 각국은 달러를 금으로 바꿔 갔고, 프랑스는 군함까지 보내 금을 실어 날랐습니다. 1971년 8월, 닉슨은 결국 금 태환 창구를 닫았습니다. 전쟁 비용이 세계 통화 질서를 바꾼 것입니다.

두 장면의 공통 구조는 명확합니다. 기축통화의 지위는 군사력이 아니라 ‘그 군사력의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서 있으며, 전쟁이 그 믿음을 시험하는 순간 통화는 안전자산에서 리스크 자산으로 재분류된다는 것. 물론 오늘의 미국은 1956년의 영국과 다르고, 달러의 네트워크 효과는 파운드와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합니다. 하지만 38조 달러의 부채 위에서 135조 원짜리 전쟁 청구서를 반복적으로 발행하는 국가의 통화가, 그 전쟁 뉴스에 더 이상 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시장이 같은 구조의 초기 단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읽을 여지가 충분합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운율은 맞춘다는 마크 트웨인의 말은, 외환시장에서 특히 자주 검증되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돈은 어디로 갔나: 안전자산 왕좌의 재편

달러가 흡수하지 못한 공포 프리미엄은 어디로 갔을까요? 상반기 데이터가 답을 줍니다.

금이 그 답의 중심에 있습니다. 다만 단선적이지 않습니다. 올해 금값은 2월 개전 직후 4,900달러까지 폭등했다가, 3월에는 유가발 금리 인상 공포로 10% 가까이 급락하는 롤러코스터를 탔습니다. 월간 기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대 낙폭이었습니다. ‘위기 때는 금을 사라’는 공식이 흔들렸다는 평가까지 나왔지만, 주목할 부분은 그 급락 구간에서도 글로벌 중앙은행들이 매입을 지속했다는 점입니다. 달러 자산의 변동성과 지정학 리스크에 대응해 ‘비신용 자산’인 금의 비중을 늘리는 전략, 즉 외환보유고 차원의 구조적 수요는 가격과 무관하게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제가 보는 핵심 그림입니다. 민간 투자자의 단기 안전자산 수요는 여전히 금리와 달러 사이에서 흔들리지만, 국가 단위의 장기 준비자산 수요는 조용히, 그러나 일관되게 달러에서 금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반복될수록, 그리고 그 전쟁의 청구서가 미국 재정으로 향할수록 이 흐름은 강화됩니다. 이번 재교전에서 달러가 오르지 않은 것은, 이 구조적 이동이 임계점을 넘어서기 시작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이는 제가 이 시리즈에서 반복해서 다뤄온 탈달러화 논의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탈달러화는 달러가 하루아침에 기축통화 지위를 잃는 드라마가 아닙니다. 위기 때마다 달러로 도망치던 반사신경이 조금씩 무뎌지고, 그 자리를 금과 비달러 자산이 잠식해 들어가는 완만한 과정입니다. 달러 스마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스마일의 오른쪽 입꼬리(공포 프리미엄)가 조금씩 내려앉는 것. 이번 주 외환시장이 보여준 것이 바로 그 장면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한국 투자자에게 주는 함의

이 변화를 한국의 관점으로 번역해 보겠습니다.

첫째, 원/달러 환율의 해석 틀을 바꿔야 합니다. 환율은 여전히 1,500원대라는 역사적 고지대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재교전에서 달러 인덱스가 오르지 않았다는 것은, 현재의 고환율이 글로벌 달러 강세의 결과라기보다 원화 자체의 문제, 즉 내국인의 해외투자 러시와 자본 유출 구조에서 비롯된 부분이 크다는 방증입니다. 지난 글에서 다뤘던 것처럼 반도체가 벌어온 달러가 국내에 재투자되지 않고 미국 자산으로 환류하는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달러 인덱스가 내려와도 원화의 갈 길은 멀 수 있습니다.

둘째, 유가 경로를 주시해야 합니다. 달러는 무덤덤했지만 유가는 반응했습니다. 호르무즈 긴장이 장기화되어 유가가 재차 상승하면,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무역수지와 물가 양쪽에서 압박을 받습니다. 가뜩이나 반도체 성과급발 수요 압력으로 물가 전망이 목표치를 웃도는 상황에서 공급측 충격까지 겹치면, 한국은행의 딜레마는 한층 더 복잡해집니다.

셋째, 코스피와 수출주에는 양면적입니다. 유가발 물가 압력과 지정학 불확실성은 지수 전반의 밸류에이션에 부담이지만, 방산·조선·에너지 섹터에는 수주와 마진의 재료가 됩니다. 3월 국면에서도 확인됐듯 지정학 리스크 국면의 한국 증시는 지수 방향보다 섹터 간 온도차가 훨씬 큽니다. 특히 반도체가 지수의 사실상 전부가 된 현 구조에서, 중동발 소음은 반도체와 무관한 변수라는 점에서 지수 충격은 제한적일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헤지 효과도 없습니다. 포트폴리오의 위험 분산이 지수 내 섹터 분산으로는 달성되지 않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넷째, 포트폴리오 관점에서 금의 역할을 재평가할 시점입니다. 상반기의 롤러코스터가 보여주듯 금은 더 이상 단순한 전쟁 헤지가 아니라 통화정책과 달러 가치에 민감한 자산이 됐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용 둔화로 금리 기대가 꺾이고 달러의 공포 프리미엄이 구조적으로 약해지는 지금의 조합은 금에 우호적인 환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고용 둔화, 물가 둔화, 달러 약세, 금리 하락이 겹칠 때 금이 가장 강하다는 공식을 기억한다면, 그 조건들이 하나씩 채워지는 중입니다. 물론 유가 급등이 물가를 재점화시키면 3월처럼 금리가 금의 발목을 잡을 수 있으니, 단기 급등 추격보다는 변동성 구간의 분할 접근이 합리적입니다.

시나리오 점검: 무엇을 보고 판단할 것인가

앞으로의 경로를 세 가지 시나리오로 정리합니다.

시나리오 A — 재협상 복귀(기본 시나리오). 트럼프 대통령이 파기를 시사하면서도 대화의 여지를 남겼고, 중간선거를 앞둔 정치 일정상 전쟁 장기화는 백악관에도 부담입니다. 몇 주 내 교전 중단과 협상 재개가 이뤄지면 유가는 되돌림하고, 시장의 관심은 다시 연준과 고용 지표로 회귀합니다. 이 경우에도 ‘달러가 전쟁에 반응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는 남으며, 구조적 신호로서의 의미는 유효합니다.

시나리오 B — 호르무즈 마찰의 만성화. 전면전은 아니지만 상선 피격과 제한 공습이 반복되는 저강도 소모전입니다. 유가에 항구적인 지정학 프리미엄이 얹히고, 물가 부담으로 각국 중앙은행의 완화 여력이 줄어듭니다. 달러는 방향성 없이 흔들리는 가운데 금의 하단이 단단해지는 환경입니다. 개인적으로 확률을 가장 높게 보는 경로입니다.

시나리오 C — 전면 확전과 봉쇄. 호르무즈의 실질 봉쇄가 현실화되면 유가 100달러 이상, 인플레이션 재점화, 그리고 역설적으로 달러의 단기 반등까지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다만 이 경우에도 전쟁 비용의 재정 부담이 동반 부각되므로, 달러 반등의 지속성은 과거보다 짧을 것입니다. 확률은 낮지만 포트폴리오의 꼬리 리스크 관리가 필요한 구간입니다.

관찰 지표는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호르무즈 통과 선박의 전쟁보험료율. 언론 헤드라인보다 정직한 실시간 리스크 지표로, 실제 봉쇄 위험이 커지면 보험료가 가장 먼저 움직입니다. 둘째, 미국 추가 예산안의 의회 처리 경과. 876억 달러 요청이 어떤 규모와 조건으로 통과되는지가 재정 악재의 크기를 확정합니다. 부결 또는 대폭 삭감 시 전쟁 수행 능력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셋째, 주간 고용 지표와 금리선물에 반영된 연준 경로. 달러의 기저 체력을 결정하는 변수이며, 고용 둔화가 이어지면 달러의 공포 프리미엄 부재가 더 도드라질 것입니다. 넷째, 각국 중앙은행의 월간 금 매입량. 구조적 준비자산 재편의 지속 여부를 확인하는 지표입니다. 다섯째, 달러 인덱스 100선의 지지 여부. 지정학 재료 없이도 이 선이 무너진다면, 이번 글에서 다룬 균열이 추세로 전환됐다는 기술적 확인이 됩니다.

맺으며: 반응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반응이다

시장 분석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움직임이 아니라 침묵을 해석하는 일입니다. 미사일이 날고 유가가 뛰는데 달러가 제자리에 서 있다면, 그 정적은 어떤 급등락보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세계의 공포를 흡수하며 강해지던 통화가 이제는 그 공포의 비용 청구서를 받아드는 위치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 4개월 전과 오늘 사이에 벌어진 이 미묘한 지위 변화가, 제가 이번 재교전에서 읽은 가장 중요한 행간입니다.

달러의 시대가 끝났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축통화의 관성은 강력하고, 대안은 아직 파편적입니다. 하지만 방향과 속도는 구분해야 합니다. 방향은 이미 정해진 것처럼 보이고, 이번 주 우리는 그 속도가 한 눈금 빨라지는 장면을 목격했는지도 모릅니다. 위기 때 달러로 도망치는 반사신경이 무뎌진 세계에서 무엇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각자의 답이, 향후 10년 포트폴리오의 성패를 가를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번 분석의 연장선에서, 중앙은행들의 금 매입 데이터를 국가별로 분해하여 준비자산 재편의 실제 속도를 측정해 보겠습니다.


면책조항(Disclaimer): 본 글은 공개된 자료와 보도를 바탕으로 한 개인적인 분석이며, 특정 금융상품의 매수 또는 매도를 권유하는 투자 자문이 아닙니다. 지정학적 상황은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있어 글 게시 시점과 실제 상황이 다를 수 있습니다. 모든 투자의 판단과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자료 출처: 미군 중부사령부 발표, 파이낸셜타임스·포칼데이터 여론조사, 뉴욕타임스, 세계금위원회(WGC), 각 언론 보도 종합